사나다 유키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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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나다 유키타카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시나노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는 다케다 신겐을 섬기며 시나노 평정을 돕고, 가와나카지마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다케다 가문의 신하가 된 후에는 시나노 센포슈로 활약하며, 간토 지방의 전투에도 참여했다. 만년에 아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157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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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유키타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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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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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나다 유키타카 (真田 幸隆) |
출생 | 기원후 1512년경 |
사망 | 1574년 6월 8일 |
직책 | 사나다 씨 당주 |
전임 | 사나다 유키요시 |
후임 | 사나다 노부쓰나 |
배우자 | 교운인 |
자녀 | 사나다 노부쓰나 사나다 마사테루 사나다 마사유키 |
가문 | [[File:Japanese_Crest_rokumonsen.svg|15px]] 사나다 씨 |
소속 | [[File:Takeda_mon.svg|20px]] 다케다 씨 |
통칭 | 겐타자에몬 (源太左衛門), 단조추 (弾正忠) |
이명 | 세메단조 (攻め弾正), 오니단조 (鬼弾正) |
아명 | 지로사부로 (次郎三郎) |
다른 이름 | 사나다 유키쓰나 (真田 幸綱) |
호 | 잇토쿠사이 (一徳斎) |
가계 | |
아버지 | 사나다 요리마사 (真田頼昌) (이설 있음) |
어머니 | 운노 무네쓰나의 딸 (이설 있음) |
형제 | 쓰나요시 유키쓰나 야자와 요리쓰나 쓰네타카 다카나가 가마하라 유키사다 운노 유키카게 하기와라 쓰나시게 |
정실 | 교운인 (河原隆正의 여동생) |
측실 | 하오 유키마사의 딸 |
자녀 | 노부쓰나 마사테루 마사유키 노부요시 가나이 다카카쓰 세이쿄? 딸 (네즈 시마노카미 노부타다의 부인) 딸 (나가사카 마사쿠니의 부인) 딸 (도야마 우마노스케의 부인) |
군사 경력 | |
소속 | 운노 무네쓰나 → 나가노 나리아키라 → 다케다 신겐 |
주요 전투 | 오다이하라 전투 도이시 성 공방전 가와나카지마 전투 오다와라 성 공방전 미카타가하라 전투 |
2. 출신
시나노 지사가타군(현재의 나가노현 도미시)의 호족인 운노 무네쓰나 또는 사나다 요리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유키타카의 인생 전반기에 대한 확실한 1차적 사료가 없고, 또 유키타카의 출신에 대해 여러 가계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어느 가문 출신이고, 아버지는 누군지, 또 “사나다”라는 성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흔히 사나다라는 성은 유키타카 때부터 쓰기 시작했고, 유키타카는 운노 가문 출신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나다”라는 성 자체도 유키타카가 태어나기 전부터 횟수는 많지 않지만 기록에 존재한다. 또, 유키타카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운노 무네쓰나나 사나다 요리마사의 관계에 대해서도, 사나다 요리마사를 무네쓰나의 사위로 보는 설이나 운노 무네쓰나의 아들인 유키타카가 요리마사의 양자가 되었다는 등의 갖가지 견해가 있지만, 어느 쪽도 아직 상세하게 판명된 것은 아니다.[6][7] (여기서는 운노 무네쓰나의 아들로 기재하지만, 이후의 조사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판명될 가능성이 있음을 덧붙인다).
1541년(덴분 10년), 다케다 노부토라가 시나노의 호족인 스와 요리시게,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함께 운노 가문의 영지였던 지사가타 군을 침공했다. 그 해 5월, 운노 가문은 운노타이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지에서 쫓겨났고, 고즈케국으로 달아났다.
3. 생애
다케다 하루노부(신겐)는 1541년에 아버지 노부토라를 국외로 추방하고 가독을 계승하여 시나노의 사쿠와 지사가타 두 군을 침공하고 있었다. 유키타카는 아버지 무네쓰나와는 달리 다케다의 신하가 되어 옛 영토를 회복하려 했다. 다케다 가문의 신하가 된 뒤로는 시나노 센포슈(信濃先方衆: 시나노 방면 군단)에서 활약했다. 1550년 8월 도이시 성 공격은 유키타카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하루노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도이시 성을 공격했지만, “도이시 대참패”라고 불릴 정도의 대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다음 해인 1551년에 유키타카가 모략으로 무라카미 군을 내부 붕괴시켜 함락시켰다. 1553년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영지를 버리고 에치고국으로 도망쳤고, 유키타카는 옛 영지를 되찾았다.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비롯하여 하루노부에게 영지를 빼앗긴 시나노의 호족들은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끊임없이 다케다를 응징할 것을 호소했다. 결국 가게토라가 이에 응해 시나노를 침공하면서 5번에 걸친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벌어졌다. 고지 2년(1556년)에 하니시나의 히가시아마카자리 성을 공략하여 그 성의 성주가 되었다. 에이로쿠 2년(1559년)에 하루노부가 신겐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하자, 자신도 잇토쿠사이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했다. 에이로쿠 4년(1561년)에 있었던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유키타카는 사이조 산의 우에스기 본진 야습 작전에 참가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끝나고 시나노가 안정적으로 신겐의 수중에 들어가자, 다케다 가문은 간토 지방에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1554년 고소슨 삼국동맹 성립 후에 다케다와 호조가 동맹 세력이 되자, 호조 우지야스는 간토를 침략하는 우에스기 겐신과 싸우면서 유키타카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키타카는 이에 응해 간토 지방의 전투에 여러 번 참가했다. 1563년에는 이와비쓰 성을, 1565년에는 고쿠야마 성을, 1567년에는 시로이 성을 공격했다.
1567년에 병으로 가독을 노부쓰나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고 전해진다. 1574년 5월 19일, 도이시 성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2세였다.
3. 1. 우에노 국 망명
덴분 10년(1541년), 다케다 노부토라는 스와 요리시게,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함께 운노 가문의 영지였던 지사가타 군을 침공했다. 그 해 5월, 운노 가문은 운노타이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지에서 쫓겨났고, 고즈케국으로 달아났다. 운노 가문의 수장 무네쓰나는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힘으로 다케다 세력을 물리치고 옛 영지 회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덴분 15년(1546년) 4월, 가와고에 야전에서 노리마사가 호조 우지야스에게 참패하면서 사실상 무력해졌고, 무네쓰나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3. 2. 다케다 가문 귀속 및 옛 영지 회복
1541년(덴분 10년), 다케다 노부토라가 시나노의 호족인 스와 요리시게,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함께 운노 가문의 영지였던 지사가타 군을 침공했다. 그 해 5월, 운노 가문은 운노타이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지에서 쫓겨났고, 고즈케국으로 달아났다. 운노 가문의 수장 운노 무네쓰나는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힘으로 다케다 세력을 물리치고 옛 영지를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1546년(덴분 15년) 4월 가와고에 야전에서 노리마사가 호조 우지야스에게 참패하면서 사실상 무력해졌고, 무네쓰나의 꿈은 좌절되었다.[8]
한편, 다케다 하루노부(신겐)는 1541년에 아버지 노부토라를 국외로 추방하고 가독을 계승하여 시나노의 사쿠와 지사가타 두 군을 침공하고 있었다. 유키타카는 아버지와는 달리 다케다의 신하가 되어 옛 영토를 회복하려 했다. 유키타카가 언제 다케다 가문 휘하로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고요군칸》에 따르면 1548년 우에다하라 전투에 이타가키 노부카타의 부장으로서 참전했다고 한다. 또, 《고하쿠사이기》에 따르면, 유키타카는 책략을 사용하여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모치즈키 가문을 다케다 측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다케다 가문의 신하가 된 뒤, 시나노 센포슈(信濃先方衆: 시나노 방면 군단)에서 활약했다. 하루노부는 유키타카에게 시나노 제압에 힘쓴 공을 인정받아 지사가타의 스와에 영지를 줄 것을 약속했다. 1550년 8월 도이시 성 공격은 유키타카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하루노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도이시 성을 공격했지만, 이 작전은 “도이시 대참패”라고 불릴 정도의 대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고하쿠사이기》에 따르면 다음 해인 1551년에 유키타카가 모략으로 무라카미 군을 내부 붕괴시켜 함락시켰다고 한다. 중요 거점이었던 도이시 성을 잃은 데다 계속되는 다케다 군의 압박을 견딜 수 없었던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1553년에 영지를 버리고 에치고국으로 도망쳤고, 유키타카는 옛 영지를 되찾았다. 유키타카는 본거지 마쓰오 성을 정비했으며, 도이시 성주를 겸임했다.
3. 3. 가와나카지마 전투 및 간토 공략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비롯하여 하루노부에게 영지를 빼앗긴 시나노의 호족들은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끊임없이 다케다를 응징할 것을 호소했다. 결국 가게토라가 이에 응해 시나노를 침공하면서 5번에 걸친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벌어졌다.[9]
유키타카는 고지 2년(1556년)에 하니시나의 히가시아마카자리 성을 공략하여 그 성의 성주가 되었다. 에이로쿠 2년(1559년)에 하루노부가 신겐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하자, 자신도 잇토쿠사이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했다. 에이로쿠 4년(1561년)에 있었던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유키타카는 사이조 산의 우에스기 본진 야습 작전에 참가했다.
5회에 걸친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끝나고 시나노가 안정적으로 신겐의 수중에 들어가자, 다케다 가문은 간토 지방에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덴분 23년(1554년) 고소슨 삼국동맹(다케다, 호조, 이마가와 가문의 세 영주가 직접 회견하여 맺은 상호 혼인동맹) 성립 후에 다케다와 호조가 동맹 세력이 되자, 호조 우지야스는 간토를 침략하는 우에스기 겐신과 싸우면서 유키타카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키타카는 이에 응해 간토 지방의 전투에 여러 번 참가했다. 사나다 가문과 친척이던 가마하라 가문과 하네오 가문 사이에서 영지 분쟁이 발생하자 유키타카가 개입하여 이를 중재했다. 에이로쿠 6년(1563년)에는 하네오 가문을 분쟁을 일으키도록 뒤에서 지원한 사이토 가문(우에스기 가문의 부하)의 본거지 이와비쓰 성을 공격했다. 또 에이로쿠 8년(1565년)에는 고쿠야마 성을, 에이로쿠 10년(1567년)에는 시로이 성을 공격했다. 맏아들 노부쓰나와 함께, 다케다 가문의 관동 공격의 중요 거점이었던 미노와 성의 성주 대리로 있었던 시기도 있다고 한다.
3. 4. 은거 및 죽음
에이로쿠 10년(1567년)에 병으로 가독을 노부쓰나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신겐의 스루가 침공이나 서상 작전에는 참가하지 않고, 주로 시나노 북부 및 조슈 지방의 방비에 종사했다.
덴쇼 2년(1574년) 5월 19일, 도이시 성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2세였다. 묘소는 나가노현 상다시 마사나다마치의 조동종 진다산 장곡사(長谷寺)(상다시)에 있다. 초상화는 나가노현 나가노시 마쓰시로마치의 장국사(長国寺)(나가노시)에 소장되어 있다.
4. 인물
하루노부는 유키타카의 지략과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유키타카가 신입이자 외지인(시나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다이 가신(대대로 내려오는 가신)과 동등한 대우를 했다. 고후 (다케다 가문의 본거지)에도 저택을 마련했다. 뛰어난 인재가 많던 다케다 가문 안에서도 한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단조노조라는 관위명으로부터 '''공격의 단조'''(攻め弾正|야스메 단조일본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5. 관련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Shingen Takeda (Character) from ''Kagemusha'' (1980)
https://www.imdb.com[...]
2013-05-17
[2]
웹사이트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真田幸隆」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0-16
[3]
웹사이트
Sanada Clan Timeline
http://www.samurai-a[...]
[4]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5]
문서
「高野山蓮華定院過去帳」長野県真田町山家神社所蔵「白山神社奥宮扉永禄5年銘」
[6]
문서
江戸時代に松代藩により編纂された真田家系図による。
[7]
문서
矢沢氏の菩提寺良泉寺所蔵の「良泉寺矢沢系図」に拠る。
[8]
서적
真田三代録 伝説から史実へ
理論社
[9]
문서
神奈川県立歴史博物館所蔵文書「天文23年推定10月5日付真田幸隆宛北条氏康書状」
神奈川県立歴史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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